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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대종사 행장

행적

진영

오도송

일생을 통해 깨달음을 노래한 위대한 격외의 말씀

석가여래부촉법제육십팔세(釋迦如來付囑法第六十八世)
용성진종대종사 연보 오도송(龍城震種大宗師 年譜 悟道頌)

용성대종사께서는 법명이 진종(震鍾)이시고 법호가 용성(龍城)이시며 속성명은 백상규(白相奎)이시다. 출생하심은 대각응세 갑자년 조선왕조 제26대 고종대왕 원년인 서기 1864년 음력 5월 8일에 전라도 남원군 하번암변 죽림리 현재의 장수 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에서 탄생하시었다. 아버지는 수원 백씨(水原 白氏)의 후예로서 휘(諱)는 남현(南賢)공이요 어머니는 신라 6부 촌장의 한 분이신 무산 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공의 후예인 밀양손씨(密陽孫氏)이시다. 어머니 밀양손씨 부인의 꿈에 법복을 수한 스님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후에 잉태하였다.

대각응세 임신년 9세(서기 1872년)
용성대사 어린 시절.

서당(書堂)에서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시제(詩題)는 합죽선(合竹扇)인 바

大撓合竹扇 借來洞庭風(대뇨합죽선 차래동정풍)
「합죽선 부채를 크게 흔들어서 동정호 바람을 빌려 오리라」

라는 시를 짓고

봄날 어린이들이 진달꽃 따는 것을 보고
摘花手裏動春心(적화수리동춘심)
「꽃을 따서 손에 잡으니 봄 마음이 동하는구나」라는 천재적인 즉흥시를 읊어 문장의 재질이 뛰어남이 원근에 알려져 그 영특함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정축년 14세(서기 1877년)
용성대사께서는 출가하여 출가시(出家詩)를 이렇게 읊었다.

不忘前世事(불망전세사)하고 夢中佛授記(몽중불수기)하사
出家德密庵(출가덕밀암)하니 其佛親夢佛(기불친몽불)이로다.
「전세사를 잊지 아니하고 꿈가운데 부처님이 수기하셨도다
덕밀암에 출가하니 그 부처님이 꿈에 친견한 부처님이로다」

기묘년 16세(서기 1879년)
용성대사께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뜻으로 분별하는 이 알음알이인 지적(知的) 미혹(迷惑)에서 벗어나 버린 경지에 이르러 견도하시고 이 경계에 이르러 견도송(見道頌)을 읊으시니 이러하다.

五蘊山中尋牛客(오온산중심우객)이 獨坐虛堂一輪孤(독좌허당일륜고)로다
方圓長短誰是道(방원장단수시도)오 一團火炎燒大千(일단화염소대천)이로다
「오온산인 몸 생각 뜻 가운데서 심우 불성을 찾는 나그네가
텅 빈 집에 둥근 달이 훤히 비치는데 홀로 앉았도다
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은 이것이 누구의 도이랴
일단 '이뭣고'의 불꽃이 대천 번뇌를 티우는 도다」

갑신년 21세(서기 1884년)
용맹 결사 정진 끝에 정(情)에 사로 잡히지 않고 뜻[意]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수도(修道)를 마치고 수도송(修道頌)을 읊으시니 이러하다.

排雲粇霧尋文殊(배운확무심문수 )타가 始到文殊廓然空(시도문수확연공)이로다
色色空空還復空(색색공공환부공)하니 空空色色重無盡(공공색색중무진)이로다
「번뇌의 먹구름을 물리치고 망상의 안개 덫을 놓아 불성을 찾아 비로소 불성 있는데 이르러니 확연히 공이로다 색색공공(色色空空)이 다시 공(空)으로 돌아가고 공공색색(空空色色)이 거듭 다함이 없도다」

병술년 23세(서기 1886년)
8월 신라불교 초전법륜 성지(聖地)인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동 아도모례원 모례샘 근처에서 용맹 결사 정진 끝에 진실(眞實)의 지견(知見)이 열리어 보리도(菩提道)를 증오(證悟)한 오도(悟道)를 하시고 낙동강을 건너시면서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시었다.

金烏千秋月(금오천추월)이요 洛東萬里波(낙동만리파)로다
漁舟何處去(어주하처거)오 依舊宿蘆花(의구숙로화)로다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신유년 58세(서기 1921년)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용성 진종 대종사께서 대각응세 신유년 58세시 서기 1921년 3월에 기미년 3.1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옥고를 치루고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출옥하였다. 4월에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역경불사(譯經佛事)에 착수하시고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승려들에 의해 우리나라 전통불교가 퇴색되고 일본 불교화 되어가고 있을뿐더러 국내에서는 이씨조선 배불정책의 뿌리가 완전히 없어지지 아니하여 스님들을 천시하고 불자(佛子)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현상이 나타났다. 용성대사께서는 이러한 병폐를 없애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온 겨레의 마음속에 심어 주기 위하여 새 불교 운동을 전개하고자 불교의 불(佛)을 번역하면 대각(大覺)이기 때문에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여 우리나라 불교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대각교 본부는 서울 종로 봉익동 3번지 대각사(大覺寺) 이다.

용성 대사께서 대각교를 창립하면서 화공(畵工) 동호(東湖) 거사를 불러 대사의 진영(眞影)을 그리게 하고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당시의 정계를 희롱하였다.

水水山山爾形 花花草草爾意(수수산산이형 화화초초이의 )
等閑來等閑居 明月照淸風拂(등한래등한거 명월조청풍불 )
拘子無佛性 趙州妄分別(구자무불성조주망분별)
東湖春水錄 白鷗任浮沈(동호춘수록 백구임부침 )
我是汝耶 汝是我耶(아시여야 여시아야)
草堂春日暖 百花爛慢開(초당춘일난 백화난만개)

「물과 물 산과 산은 부처님 모습이요 꽃과 꽃 풀과 풀은 조사님 뜻이로다
한가로움을 기다려 왔다가 한가로움을 기다려 가는데 달이 밝게 비침을 맑은 바람이 도웁는구나.
개새끼에게 불성이 없다 함은 조주선사의 망령된 분별이요
동호의 봄 물은 푸르른데 백구는 뜨고 잠김을 임의로 하는구나.
내가 이 너인가 네가 이 나인가
초당의 봄날이 따뜻하니 백화가 익어 방자하게 피었도다」

대각응세 경진년 77세(서기 1940년)

제행지무상(諸行之無常) 이요
만법지구적 (萬法之俱寂) 이로다
포화천리출(匏花穿籬出) 이니
한와마전상(閑臥麻田上) 이로다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이 다 고요하도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라는 임종게(臨終偈)를 읊으시고 나서 시자여, 대중이여, 그 동안 수고했도다 나는 간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빙긋이 웃으며 입적(入寂)하시니, 세수(世壽)는 77세요 법랍(法臘)이 61세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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